언론보도

선진국의 장애학생 학습지원 속기서비스

  • 관리자
  • 2008-01-24
UCLA의 속기 서비스, 하나부터 열까지
LA에서 날아온 편지, 둘 - UCLA의 청각장애학생 학습지원 시스템 (2)

박민정 객원기자 메일보내기

오랜만입니다. 다들 잘 지내셨는지요. 저는 드디어 LA에서의 11개월 일정을 모두 마치고 얼마 전 드디어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쾅 하고 닿으며 착륙하는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더군요. 건강히 잘 다녀왔어요. 아직도 저 멀리 바다 건너에 두고 온 많은 것들이 너무나 그립지만,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는 또 갈 기회가 있겠지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때의 경험들이 앞으로의 인생에 좋은 자양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서울은 일년 새 참으로 많은 것이 바뀌어 있네요. 20년 넘게 살아온 서울이 이토록 낯설고도 새롭게 느껴지는 것도 처음입니다. 어찌나 사람이 많고 길이 험한지, 오히려 재적응 하는 것이 더 힘들군요.

두 번째 주제는 속기 서비스를 받기 위한 제도적 절차입니다. 국내에 자료가 특히 미비한 부분이기 때문에 지난 호에 이어 속기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하도록 할게요.

장애학생 지원을 위한 수강신청 제도

지난 호를 읽었던 분들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내가 강의실 안에서 두 명의 속기사를 양 옆에 대동하고 수업을 듣던 모습을. 두 명의 속기사가 15분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교수님의 말씀을 전부 입력해 주었고 나는 그것을 토대로 스스로의 노트를 만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속기제도는 어떻게 해서 운영되는 것일까?

어느 대학교나 다 그렇듯 새 학기가 시작되기 몇 달 전에는 다음 학기를 위해 수강신청을 한다. UCLA에서도 이전 학기가 반 쯤 지났을 때 다음 학기를 위한 수강신청을 한다. 이 때 장애학생은 다른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시작하기 며칠 전에 수강신청을 할 수 있는 제도인 ‘enrollment priority term’이 있다. 각 학생들의 서비스 수요를 파악하여 미리 인력과 설비를 갖추고(청각장애의 경우 속기사 수요 파악), 지체장애학생들도 강의실 간 접근성을 고려하여 미리 수강신청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제도이다. 장애학생 지원센터에서 학교 측의 협조를 받아 수강신청 1주일 전에 공지 메일을 보내준다. 그러면 심사숙고 후에 원하는 과목을 신청하면 되는 것이다.

수강신청 할 때 고려할 점

△ UCLA 장애학생 지원센터인 OSD(Office for students with disabilities) 내의 청각장애 전문 담당자 Dan이다. 1년간 나의 속기서비스를 확실하게 관리하고 속기사와 연결해 주신 고마운 분.
ⓒ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
이 때 쉬는 시간 하나도 없는 빡빡한 시간표보다는 강의와 강의 사이에 1시간 정도 쉬는 시간을 만들어 두는 것이 좋다. 그 이유는 우선 청각장애 학생의 경우 수업시간에 꽉 차게 속기를 받아도 아무래도 복잡한 소리체계를 문자로 풀어쓰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수업시간 직후 교수님과 속기사 선생님께 물어볼 수 있는 여유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속기사 선생님들의 이동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모니터가 딸린 큰 속기 기계, 그 기계를 지탱하기 위한 튼튼하고 묵직한 철 삼각대(거의 쇠파이프 수준), 대용량 배터리가 딸린 노트북과 이 기계들을 모두 연결하는 복잡한 어댑터 선들을 집어넣은 큰 캐리어 가방(바퀴달린 그 큰 가방)의 무게는 무려 수십 킬로그램에 달한다. 이 장비를 매 수업시간마다 미리 와서 설치하고, 수업이 끝나면 다시 분해하고, 다음시간에 다시 조립하고 어댑터 선을 연결할 콘센트를 찾아다니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 때 쉬는 시간 없이 수업 세 개를 다닥다닥 붙여 놓으면, 아마 예쁨을 받기가 좀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안정적인 시간표를 짠 뒤 속기 희망과목 리스트를 장애학생 지원 센터의 청각장애 담당자인 댄(Dan)에게 보냈다. 그러면 댄은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속기사와 학생의 시간표를 고려해서 한 시간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속기를 제공할 수 있도록 모든 행정적인 준비를 갖춰 준다. 그 덕분에 내가 마지막 날까지 무사히 수업을 듣고 돌아올 수 있었다.

철저하고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

△ 장애학생 지원센터(OSD)에 서비스를 요청하기 위해서는 담당자가 장애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도록 이렇게 학생 정보 카드를 작성해야 한다.(위) 노트대필(혹은 속기 서비스) 요청 신청서와 대필을 해주고 싶은 학생들을 위한 지원 신청서.(아래)
ⓒ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
처음 UCLA에 들어와서 장애학생 지원 서비스를 받으려면 장애학생 지원센터인 OSD(Office for Students with Disabilities)에 가서 장애종류별로 담당자를 만나 상의를 하고 정식을 등록을 해야 한다. 담당자가 학생에 대해 잘 알 수 있도록 장애와 관련하여 개인 신상을 진술하는 서류를 작성하고 장애 증상을 적은 진단서도 첨부해서 내야 한다. 나의 경우 담당자 댄에게 청각장애 검사 결과표를 제출했었다. 그래서 나에게 딱 맞는 맞춤 서비스인 실시간 속기를 받기로 결정할 수 있었다. 또한 속기를 받기로 된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할 일이 하나 있었는데, 수업 후 속기사가 메일로 보내주는 속기록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고 학문적 용도가 아닌 다른 용도, 특히 상업적 용도로 쓰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에 사인을 해야 했다. 참으로 철저하고도 체계적인 서비스가 아닐 수 없다.

저작권과 학습권

가끔은 애로사항도 있었다. 한 가지 꼽자면 내가 전에 들었던 한 전공 수업에서 일어났던 일인데, 첫 수업에 들어갔더니 교수님이 속기를 허용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수업의 저작권 문제로 거절을 하셨던 것 같다. 당황한 나는 댄에게 연락을 했고 나중에 댄이 교수님과 몇 번의 통화와 이메일을 주고받은 끝에 간신히 승낙을 받아내어 속기사를 대동하고 수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로지 수업시간 내 강의실 안에서만 읽을 수 있다’는 단서가 붙은 이후였다. 가뜩이나 말씀이 빠른데 영어로 진행되는 어려운 전공 수업내용을 그 시간 내에 모두 읽고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눈으로 모든 것을 해야 하는데, 생각해 보자. 빠르게 지나가는 속기록을 읽는 동안에는 노트필기를 할 수 없고, 또 반대로 필기를 하는 동안에는 화면을 읽을 수가 없다. 건청인 학생들은 귀로 소리를 듣는 동안 노트를 보며 필기를 할 수 있지만 청각장애 학생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통하지 않았다. 저작권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이해하지만 학생에게 전달도 되지 않는 수업내용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내게는 수업 후에 읽고 복습하고 노트를 만들 속기록이 정말로 필요했다. 게다가 나는 이미 속기록을 외부에 유출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사인까지 했는데, 그 이상 학생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한 저작권인가. 교수가 학생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대학의 틀 내에서 강의를 할 수 있을까. 제도가 아무리 잘 갖추어져도 인식이 깨이지 않는다면 진정한 장애해방은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미국에서도 할 수 있었다. 선진국이라는 미국조차도 아직 완벽하지는 않은 것 같다.

△ 수업 중 다른 학생에게 부탁해서 어렵게 찍은 사진. 사진 한 장에 많은 것이 나타나 있는데 앞에서 교수님이 말씀하시고, 속기사가 속기하고 나는 속기록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읽으면서 나름대로의 내 노트를 만드는 장면이다.
ⓒ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
한 줄기 빛과 같았던 친구들

내게는 수강변경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두 속기사의 스케줄과 함께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강철회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옆자리 학생들이 노트를 빌려 주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후에 장애학생 지원센터 측에서 그 수업을 듣는 학생 모두에게 메일을 보내 노트를 제공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처럼 학비의 일부를 감면하는 혜택을 주었다. 그 때 내게 소중한 노트를 보여주었던 Erin과 Katza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마음고생 심하게 하던 시기에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친구들이었다. 참, 그 교수님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대화하여 생각의 차이를 조율하지 못했을 뿐이다. 중간고사 시험 3일 전에는 장애학생 지원센터 내에서 속기록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해주셨고 그 몇 백 페이지에 달하는 속기록을 읽을 수 있도록 나를 며칠 후에 따로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해주시기도 했다.

모든 정보에의 접근을…

외국에서 살면서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지금 돌아와서 생각해볼 때 스스로 좀 더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미국과 같은 선진적인 학습 환경에 대해서도 부족한 점이 있다는 비판적인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론 수업뿐 아닌 레크리에이션 센터의 각종 재미난 강좌들과 강연, 쇼, 세미나들을 포함하여 ‘사람이 말을 하는’ 모든 일들에 자막이 지원되기를 바랐다. 당연히 들을 권리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조차 아직도 갈 길이 먼 것이 청각장애인의 정보 접근권이다.

그래도 내가 미국 대학에서 경험했던 속기 제도는 태어나 받아본 것 중 최고였다. 미국에서는 대학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든 곳에서 속기 서비스를 지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청각장애인들이 많이 ‘듣고’ 배울 수 있도록 속기 서비스가 도입되고,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이글은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http://www.accessrights.or.kr/)에서 발행하는 자유공간 102호(2006년 9ㆍ10월)에 실려 있습니다.